나는 파워포인트로 라면도 끓여먹을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파워포인트는 전지전능한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업무 시간을 되돌아보면 파워포인트에 80%, 아웃룩에 20% 정도를 할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워포인트는 곧 업무다. 업무를 잘해야 성과가 난다. 그러니까 파워포인트를 잘해야 한다. 여러분, 파워포인트 단축키를 외우세요. 화려하고 다양한 도식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익숙해지세요.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편, 파워포인트는 가증스럽다. 정말 말 그대로 망할 놈의 파워포인트다. 위대한 빌 게이츠가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소프트웨어 주제에 왜 이렇게 모든 다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이 전지전능한 파워포인트를 활용하여 영상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수백수천 개의 자동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연결하면 된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들이면 단편 영화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파워포인트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포스터도 만들 수 있고 책을 만들어 출판도 할 수 있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활용하는 어떤 작업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파.워.포.인.트다.
이 뿐만이 아니다. 수천만 원에서 수천억, 수조짜리 의사결정을 하는 데 사용되는 프레젠테이션 자료의 90% 이상은 파워포인트로 만든다.(대충 90% 맞겠지 뭐) 나는 소위 MBB*라 불리는 컨설팅 3 대장의 대표 이사들은 파워포인트를 만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향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삼세번씩 총 아홉 번의 큰 절을 매일매일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대표 이사들은 외국인이겠지만,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대표 이사도 외국인이지만(사티아 나델라) 큰 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높은 수준의 공경 표현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큰절을 해야 된다. '실행'을 하지 않는 컨설팅을 도대체 무엇이 먹어 살리느냐? 바로 파워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컨설팅 회사가 만드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한 장, 한 장의 가치가 높게는 억대인 경우도 있다.(농담이 아니다. 맨 처음에 라면을 끓여먹는다는 건 농담이었는데 이건 진짜다.)
*MBB: McKinsey & Company, Boston Consulting Group, Bain & Company의 이니셜을 따서 MBB라 부른다. 요즘은 Bain이 두 번째 B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파워포인트를 썼고 내일도 파워포인트를 쓸 것이다. 직장인 13년 차인 나는 아무것도 작성되어있지 않은 새하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도식과 단어가 떠오른다. 상단의 헤드 메시지가 떠오르고 그 유명한 McKinsey의 논리 구조에 따라 좌우에 As-is와 To-be 내용을 써 내려갈 준비가 된다.
이것은 마치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거나 음악가가 멜로디를 창조해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는 곧 신들린 듯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여 슬라이드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예비 직장인 여러분, 취업 준비생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을 전공했든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파워포인트를 쓰게 될 것이니까요.
데이터 분석을 전공했나요?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를 쓰게 됩니다.
기계공학을 전공했나요? 여러분은 파워포인트 기계가 됩니다.
광고를 전공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전략을 전공했다고요?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를 진짜 많이 쓰게 됩니다.
디자인을 전공했나요? Adobe 프로그램을 주로 쓰겠지만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도 그만큼 많이 쓰게 됩니다. 무엇을 전공했더라도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를 가장 많이 쓰게 됩니다. 여러분이 초졸, 중졸, 고졸, 대졸, 석사, 박사든 상관없어요. 여러분은 파워포인트를 쓰게 될 겁니다.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파워포인트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투로 오늘의 글을 써 내려갔지만 슬프게도 위의 내용은 90% 이상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파워포인트 블루스*다. 비슷한 느낌으로 엑셀 블루스도 써볼 수 있겠다.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블루스: 흑인의 슬픔과 애환을 담은 음악을 일컫는 말, 블루스의 어원과 관련한 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우울과 슬픔을 의미하는 영국의 극작가 조지 콜먼의 1798년 작품 '블루 데블스(Blue Devils)'에서 가져왔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다.(글 출처: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0/05/45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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