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출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다.
일터에 몸을 던져 넣고 기어이 하루치의 노동을 해보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명이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었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어머니가 눈도 못 뜬 당신의 입에 토스트를 밀어 넣기 전까지는 비몽 사몽하며 잠에서 깰 수 조차 없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하니 매일 아침에 스스로 눈을 뜨고 옷가지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서 돈을 벌러 간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직장인에겐 방학도 없어 소중한 휴가를 쓰지 않고서는 평일에 늦잠을 잘 기회 따위도 없다. 참, 이때 우리가 어떠한 기분으로 출근하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도록 하자. 굳이 거룩한 목적과 의도가 아니더라도 현관문에서 구두나 운동화에 왼발 오른발을 집어넣고 첫 발걸음을 떼는 행위 자체가 매우 위대하나니.
이제 출근의 위대함의 정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출근은 갈아타야 하는 대중교통이 많을수록, 경로가 복잡할수록, 거리가 멀 수록 더 위대하다. 나는 9년 간 편도로 약 75km 정도 되는 거리를 출퇴근했다. 집은 서울, 회사는 경기도 이천이었기 때문이다. 마포구, 송파구, 성북구 세 곳을 순서대로 이사했는데 송파구에서는 그나마 가까워서 편도 60km 정도의 거리였다. 약간 짧아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왕복으로 하면 120km의 긴 거리다.
출근하는 동안 참 여러 생각을 했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하루에 약 3시간 정도를 출퇴근에 소모한 것 같다. 운전대를 잡고 있노라면 3시간 곱하기 평일 5일 곱하기 52주는 780시간이며 이를 하루(24시간)로 환산하면 32.5일이 나온다. 9년을 출퇴근했으니 292.5일을 꼬박 운전만 한 셈이다.
출근할 때는 주로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고 퇴근할 때는 중부 고속도로를 이용했으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고속도로에 내 소중한 인생 중 약 10개월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 아까운 내 생이여,
고속도로에 흩뿌린 시간이여.
그러나 나는 자부하건대, 이 위대한 출근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머릿속으로 매일 해야 할 일을 미리 정리했고(그래서 출근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일을 시작하는 신기를 부렸고) 때로는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이맘때 팟캐스트에도 빠져서 한창 유행하던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세 번씩 정주행 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저 멍하게 명상하듯 운전을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때면 마치 자율주행을 한 듯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그 맘때 나는 “회사 어디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아, 저는 경기도 이천으로 출퇴근하는데요… 거리가 좀 멀지요 하하."와 같은 멘트로 내가 얼마나 회사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다니는지 표현했다. 이렇게 먼데도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 삼아 나의 출퇴근이 함의하는 위대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사실 사람들이 우-와... 하는 표정을 보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9년 간의 위대한 출근을 마치고 나는 두 번의 이직을 했고, 최근에는 조금 덜 위대한 출근을 하고 있다. 출근 거리도 시간도 짧아졌다는 뜻이다. 집과 회사가 흔히 표현하는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나는 대개 버스를 타는데 한 번에 가는 경로가 많다. 버스에서 내릴 때 부터 노래를 듣기 시작하면 왕복 4차선의 짧은 횡단보도를 지나 회사의 건물로 들어서서 내 자리에 앉는데 한 곡이 채 끝나지 않는다. 이전처럼 무엇인가 생각을 하거나 팟캐스트를 한 편 듣거나 이북을 집중해서 읽기도 참 어려운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출근이 조금 덜 위대해졌음에도 불구하고(그리고 내가 고생스럽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대표적인 지표가 사라졌음에도) 최근의 생활이 훨씬 즐겁다. 고속도로에 늘어선 끝없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후미등을 구경하는 것보다 청계천과 북촌을 산책하며 걸음걸음에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행복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출퇴근 거리는 짧은 게 최고다.
당연히 재택근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출퇴근 거리가 0에 수렴할수록 굳이 출퇴근 거리를 자랑할 필요도 없고 삶을 교통수단에서 낭비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그럴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출퇴근의 거리와 시간에서 해방되길 바란다. 멀든 가깝든 모든 사람의 출퇴근은 위대하지만, 우리 모두의 삶이 더 위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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