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다소 격앙된 논조인 것은 선후배라는 알량한 관계를 들이대며 말도 안되는 부탁을 하거나 대가 없는 노동을 요구하거나 나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을 강요했던 몇 가지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모든 '선배'들이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당신이 찔린다면 그건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학교와 회사, 그리고 군대 등에는 이른바 선후배라고 불리는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위나 나이 따위가 본인 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을 선배, 반대의 경우를 후배로 부른다. 상하 관계가 뚜렷한 선후배 관계는 시키는대로 하라는 상명하복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늘 같은 선배', '까라면 깐다.', '어디 감히' 등의 표현들이 선후배와 관련있다.
선후배 관계의 기준은 매우 명확하고 간단하다. 그저 '먼저' 이기만하면 된다. 먼저 입사 또는 입대하기만 하면 된다. 선배는 당연히 존경해야 하는 존재,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치가 떨린다. 학번과 기수, 입사년도로 쉽게 정리되는 이 관계는 세상을 순식간에 강자와 약자, 지시하는 자와 따르는 자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관계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소위 싸가지 없고 근본없는 '놈'들로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언제 사용하는가? 쉽게 말하자면 아쉬울 때다. 부족하지만 좀 잘 봐달라는 이야기다. 지금 내 수준은 부족하지만, 또는 지금 나의 생각이 당신의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 당신은 나의 선배니까 알아서 잘 챙겨주실거라 믿는다와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실제로 존경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이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냥 선배님은 존경하는 대상이니까 그렇다.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는 표현을 듣게 된 선배는 고양감을 느끼며 후배에게 조종되기 시작한다. 지적하거나 개선할 만한 포인트가 있어도 참고 말을 아낀다. 그리고 때로는 '존경하는 선배님' 뒤에 붙은 문장과 의도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전달하는 경우도 꽤 자주 생긴다. '내가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라며 선후배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킨다.
'내가 아끼는 후배'라는 표현도 생각해보자. 언뜻 따뜻해보이는 이 표현은 본인이 선배로서 후배보다 잘나고 앞서 있음을 시사하며, 후배는 나약하고 돌봐줘야 하고 잘 모르고 서툴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키웠다, 가르쳤다라며 본인이 육성한 결과물임을 주장한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는 나의 후배다'라고 규정하는 것을
폭력의 행위로 규정하고 싶다.
나는 부모도 형제도 아닌 이 관계에서 누가 누구를 돌봐준다는 이 사상이 싫다. 선후배가 없이 조직과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냐라고 반문할 당신에게 나는 '역할'이라는 말로 담담하게 답하고 싶다. 조직과 사회는 역할을 정의하고 그 역할에 맞는 생각과 행동을 요구한다. 적합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 역할을 맡아야 하고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정상 상태'이다. 그런데 역할이 엉망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역할의 가장 큰 적이 선후배 관계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럴 듯한 연대의식으로 포장한 이 관계가 조직과 사회의 역할을 훼손하고 뭉개어 썩고 냄새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후배 관계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소속감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가족과도 같은 관계라고 주장할 수 있겠다. 선후배 관계가 있어야만 전통과 역사가 이어질 수 있다고. 동양의 고유한 문화라고. 그러나 선후배 관계는 수직적인 문화를 고착화 시킴으로써 자주성을 없애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게 만드는데 더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선후배 관계는 모든 주체적 자아에게 득보다 실이 많다. 그리고 선후배 관계 없이도, 아니 선후배 관계가 없어서 빠르게 발전하면서도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있게 낼 수 있는 국가와 학교와 회사와 조직이 이미 존재한다.
이 글을 읽고 '아니 그래도 좀 그렇네'라며 딱히 적당한 반박할 근거 없이 화가 먼저 나는 당신은 지금 그대로 선후배 관계 속에 살아도 괜찮다. 당신은 이미 틀렸다.
이 글을 읽고 뜨끔한 마음이 먼저 드는 당신은, 나와 함께 선후배 관계를 버리자. 당신이 선후배 관계로 보았던 이득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 누군가 얻어야 했던 기회를 강탈할 것에 불과하며, 당신도 부당하게 당했던 기억들은 당신이 선배가 되는 순간 희미해지고 잊혀졌지만 누군가에게는 또 다시 닥칠 불행임을 잊지 말자.
이제 우리는 선후배 관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당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누구의 선배도 누구의 후배도 아니며 그렇게 규정될 필요도 없다.
'04.에세이 - 일하고 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택근무가 없애버린 것 (0) | 2023.02.19 |
---|---|
위대한 출퇴근과 조금 덜 위대한 출퇴근 (2) | 2023.02.19 |
애매한 재능 (0) | 2023.02.18 |
개발이나 할 걸 그랬다고요? (0) | 2023.02.07 |
파워포인트 블루스 (0) | 2023.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