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나는 이른바 이직의 종착지라고 불리는 회사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S로 시작하는 대기업 그룹이 '경력 이직의 종착지'라 불리고 있으며 나는 특정 회사가 아닌 그룹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사실 회사를 옮길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 근무했던 회사가 워낙 좋기도 했거니와 이직이라는 것은 나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런 지난 2년 동안 세 번의 이직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곳을 목표로 마치 루피가 원피스를 찾아 헤매듯 떠다닌 것은 아니다.(루피처럼 원피스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강해지기나 했으면 좋겠다...) 나 나름의 생각과 결심으로 회사를 다녔고, 옮겼고,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곳을 이직의 종착지라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 표현을 썼을 때 모두가 다 끄덕끄덕 거리며 수긍한 것으로 보아 적절한 비유임이 증명되어 뿌듯한 기분이 든다.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내가 가장 먼저 쓴 수식어라면 남몰래 자랑스러워하고 싶다.
이 기업을 내가 왜 이직의 종착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외부에서 바라봤던 관점과 구성원 중 일부가 되어 느낀 점을 종합하여 요약해보겠다.(이것은 절대 자랑을 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이직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한 관찰기 또는 감상문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다.)
1. 회사는 다 거기서 거기인데, 그중에서 이 회사가 가장 좋다.
약간 시니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어차피 국내 회사라면 거기서 거기다. 좋은 쪽으로도 그렇고 좋지 않은 쪽으로도 그렇다. 몇 번 이직해본 사람은 이 말이 무엇인지 금방 알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일하게 될지는 운이다. 회사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전생을 원망하거나 고마워하도록 하자.
여하튼, 당신이 외국계나 스타트업과 같은 회사로 가지 않는다면 결국 갈 곳은 국내 기업뿐이고 국내 기업이라면 당연히 10대 그룹쯤에 속하는 대기업 집단을 가는 게 좋다. 내가 지금 근무하는 이곳은 그 대기업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연봉과 복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어느 회사가 모든 직원들에게 허먼 밀러 의자를 지급하고 레고 랜드를 미리 오픈시켜서 가족까지 초청하겠는가?(그룹의 모 멤버사 사례) 단순히 복지뿐만이 아니라 연봉도 높은 수준이다. 그래서 여기서 옮겨봤자 더 높은 수준의 조건으로 맞춰 줄 수 있는 기업은 거의 없다. 또한, 이직할 때는 그동안 쌓아놓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떠나야 하기 때문에 웬만큼 높은 수준으로의 점프가 아니면 해선 안된다. 이 말은 곧 이 회사에 온 이상 더 나은 조건을 위해 이직을 할 필요가(혹은 이직할 수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종착지가 맞다.
2. 경력직이 (정말) 많다.
우리 그룹은 아마 한국 대기업 중에 경력직 비율이 가장 높을 것이다. 절반 이상은 경력직이지 않을까싶다. 이 말은 공채로 인한 텃세가 상대적으로 덜하단 이야기다. 이게 경력 이직에 얼마나 중요한 지 느껴본 사람은 알 것이다. 80% 이상이 공채인 조직에 경력직으로 입사한다는 것은... 웬만큼 강인한 정신력과 시장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뜯어말리고 싶다. 아니,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실패 확률이 굉장히 높다. 여기서 실패란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이직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러한 경우를 꽤 많이 봐왔다. 어렵게 어렵게 모신 인재들이 공채(혹은 기존 세력)의 정치와 텃세에 못 이겨 다시 떠나버리는 슬픈 뒷모습을.
경력직이 많다는 것은 여러 모로 장점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람들끼리 금세 잘 어울리게 된다. 다들 다른 데서 왔기 때문이다. 공채가 많지 않고 신사업과 조직도 워낙 많으니 히스토리를 많이 안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도 없다. 나는 종종 내가 여기에 경력으로 입사했는지 아니면 원래 다니고 있었는지 잊는다. 그만큼 외부에서 온 사람이 잘 섞일 수 있다는 말이다. 다양한 회사에서 모였기 때문에 웬만한 국내외 기업의 사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3. 지킬 건 지킨다.
여기서 '지킬 것'이라는 것은 참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사람 사이의 예의도 기업의 윤리 차원에서도 그렇다. 이른바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환경, 사회, 지배구조)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고 사회적 가치(Social Value) 창출에도 힘쓰고 있다. 넷 제로(Net-Zero)도 실천한다. 심지어 최근 개정한 경영철학에 따르면 이 회사 경영의 목적은 '구성원의 행복'이다!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고,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고, 지킬 걸 지킨다는 건 거칠게 이야기해서 돈을 많이 번다는 이야기다. 이게 다 돈을 넉넉하게 잘, 많이 버니까 신경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 힘든 회사(영업이익이 마이너스 플러스를 왔다 갔다 하는)가 저런 것들을 신경 쓰다간 당장에 주주 총회에서 고성과 함께 욕설이 오갈 일이다.
지킬 건 지키는 문화는 곧 사람 간의 '거리'의 존중으로 이어지며 이는 '자율'로도 연결된다. 커피나 복사 심부름, 강압적인 업무지시와 그 반대의 경우인 업무 태만 따윈(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임원들도 웬만하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직접한다.(당연한 말인데 이상하게 들린다면 당신은 정상적인 직장인이다.)
자기들이 손이 없어 발이 없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게 팀장과 임원일 것이다. 여기 계신 팀장과 임원들은 다 손도 있고 발도 있으시다. 그리고 그걸 실제로 사용하신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지킬 건 지키는 문화는 꽤 괜찮은, 건강한 조직을 만드는 게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더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 같지만 언제나 모든 이유는 3가지로 압축하는 게 제일 보기 좋으니까 여기서 줄이도록 하자. 그리고 더 쓰다 보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회사의 단점도 꽤 많이 언급하게 될 것 같다.(솔직히 단점 없는 회사가 어디 있나?) 지금 이 그룹에 다니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 회사를 칭송하며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만만 가득한 사람도 있고 그로 인해 떠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이 글은 '경력 이직의 종착지'로서 드러난 특징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회사에나 있을 수 있는 어두운 면이나 단점의 언급은 과감히 생략토록 하자.
그렇다면 나는 이직의 종착지인 이곳에서 평생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게 될까? 그건 잘 모르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3년의 직장생활, 38년의 삶을 돌이켜 봤을 때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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